사업부에서 그룹장님을 모시고 올라오던 길에 뜬금없이 물어보셨다.
“addict.아 우리 같이 일한지 얼마나 되었지?”
“에이 그룹장님 입사일부터 계산하면 되잖아요”
“그렇네..거의 일년 다 되어간다. 그지?”
우린 아직도 술자리에선 그룹장님의 입사 첫날을 이야기하곤 한다.
8월 중순의 어느날. 무척이나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창도 없어 더욱 답답했던 테스크룸. 출근해보니 새로 부장님 한분이 오신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누구지? 그 저번부터 온다던 e머시기 부장인가?”
한국말 잘 못하는 교포 출신의 부장 한명이 온다는 소문은 끊임없이 있었다. 사실 우리 태스크팀원들에겐 모두 귀찮은 일일뿐이었다. 태스크 시작후 한달동안은 리더도 정해지지 않았었다. 리더 후보자들이 다 고사하여(신사업 태스크는 누구나 꺼려하는 태스크다) 우여곡절끝에 선정된 리더는 교육차 해외에 있다 최근에 귀국했었다. 그나마도 다른 사업그룹의 그룹장인 탓에 낮에는 해당 그룹일을 보고 밤에 와서 우리에게 보고받는 상태였다.
딱히 답이 보이지 않는 태스크속에서 점점 지쳐가던 우리들에게 조직적으로 점점 복잡해지는 건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기존 리더에게 보고하는 것도 부담인데, 부장님이 한 분 더 오시면 일은 더 늘기만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부장님 한 분이 더 오신다니, 그냥 우리가 쓰던 평상을 같이 쓸 순 없기에 급히 총무팀에 연락하여 책상 하나를 더 구했다. 지금의 그룹장님의 얼굴을 처음 뵌 건, 다른 건물에서 구해오느라 흠뻑 비에 맞았던 그 책상을 휴지로 열심히 닦을 때 였다.
“내가 재입사 후 젤 첨한 일이 뭔지 기억나냐. 레이 아웃하고 짐 나르던 거자나.”
역시 또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가 첫 날 우리가 한 일이었다. 6명의 태스크 팀원과 2명의 부장이 생활하기에는 룸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그나마 아주 조금 넓었던 옆 방으로 이사를 했다.부족한 공간에 어떻게든 효율적인 자리배치를 하기 위해 이리저리 머릴 굴렸었다. 결국 그 날 하루 일은 거의 못했고 비 오는 날 먼지내며 책상 옮긴 것이 전부였다.
오해는 금방 풀렸다. 그룹장님의 인상은 누가 봐도 ‘된장’ 스타일이었다. 여기서 된장이라함은 된장남의 그것이 아니라, 버터와 대비되는 토종이라는 뜻의 된장이다. 우리가 소문으로 들었던 그 교포부장님은 전혀 다른 분이었다. 하지만, 진짜 오해는 풀리지 않았었다. 그 분의 수수한 외모, 약간 어눌한 말투에 우린 착각을 했었다. 약간 트랜디하면서 팬시한 인더스트리를 다루고 있었기에 이 분은 그런 분야와는 무관한 분이라 선입견을 가진 것이다. 사회에 진출한 후로 각종 쪽팔린 경험을 다 겪어봤지만, 지금 생각만 해도 귀가 빨개지고, 얼굴이 후끈거리는 기억이, 우리가 그룹장님을 앞에 두고 해당 인더스트리에 대해 가르쳤다는 것이다. 겨우 몇 년 관심가지고 지켜 본 지식과 몇 개월 태스크 경험을 가지고 말이다. 우리 그룹장님 참 성격도 좋으셨지.
아마도 본부장님께 중간 보고 드리고 난 직후 였던 거 같다. 우린 분명히 태스크의 목표가 향후 사업본부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 믿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보수적이며 완고한 top management의 생각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린 피보고자들이 자리를 뜬 회의실에서 나오질 못했다. 보고준비에 지쳐 있던 채로 ‘우리 회사가 뭐 그렇지..’ 서로 자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때였다. 그동안 쭉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만 보시던 그룹장님께서 매직을 들고 보드앞에 서신 것은.
“여러분, 우린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칠판위에는 전체 인더스트리의 밸류체인이 그려졌으며, 향후 우리의 ‘하고 싶음’과 현재 우리의 ‘할 수 있음’의 괴리가 정의되었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그 괴리를 메우기 위해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이 도출되었다. 우리가 그동안 어디서 헤매고 있었는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삽질을 하고 있었는지가 그 보드속에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었다.
처음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말 그대로 ‘개안’의 느낌을 맛본 것은. 그룹장님의 말씀이 끝난 후에도 우린 가슴이 계속 뛰었다. ‘리더의 역할은 조직에 비전을 제시하고, 조직원들의 행동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말은 그저 교과서에서나 있는 표현인 줄 알았었다. 사실, 그 날 느꼈던 흥분과 감동이 인더스트리와 전략에 대해 눈을 떳다는 느낌때문인지, 진심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리더를 만났다는 기쁨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았다. 어쨋든 우린 그 날로 그 분을 우리들의 진정한 ‘리더’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오해는 다 풀린 것이 아니었다.
회사의 인사평가 및 조직이동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관행이 있다. 조직이동자의 인사평가가 불리해 지는 것이다. 어차피 평점에 대한 쿼터는 정해져 있으니 이젠 더 이상 ‘내 새끼’가 아닌 사람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것이다. 특히나 이동시기가 인사평가 시기라면 가장 최악이다. 불행히도 우리 태스크팀원들의 ‘결정의 시기’가 딱 그 때였다.
태스크 활동후 신사업 전개가 결정되었기에 이제 해당 사업을 책임질 정식 조직이 필요해 졌다. 1차 리쿠루팅 대상은 물론 기존 태스크 팀원들. 기존 조직으로 복귀하느냐 새로운 조직의 창립(?) 회원이 되느냐의 결정의 순간에 addict.군과 그의 후배 D군의 고민은 컸다. 일단 생각하기에는 옮기는 것은 부담이 컸다. 늦은 나이에 사회에 나온 올드 루키 addict.군은 가뜩이나 직급도 낮은데 평가까지 잘 못 받으면 향후 진급에 미칠 악영향이 눈에 보듯 선했다. Addict.군을 이 회사로 데려온 후배의 경우는 상황이 더 심각했던 것이 그 해가 바로 진급년이었기에 평가가 나쁠 경우 바로 진급누락이었다.
둘이서 이런저런 고민을 했지만, 결론의 기준은 결국 사람이었다.
“내가 회사생활 얼마 안 해 봤지만, 이런 기회 별로 없을 거 같아. 믿고 따를 수 있는 리더밑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그건 그래요, 형. 에이 몰라 몰라. 걍 하자구요.”
기존 태스크팀원 6명 중 5명이 같은 선택을 했다. 본부내에선 작은 파문이 일었다. 이렇게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신사업 조직을 선택한 경우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addict.군을 제외하곤 다들 기존 조직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멤버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놀라움은 더 컸다. 다른 분들은 기존 조직으로 복귀하라는 유무형의 압력을 다 이겨내고 조직이동을 이루어 냈다(여기에는 또 별별 스토리가 다 있지만 조직내부이야기이기에 넘어가도록 하자). 모두의 선택에는 리더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깔려 있었다. 이런 리더 밑에서 일할 수 있다면, 이 정도의 고난(?) 정도는 이겨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우린 여전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정식 조직 발족을 위해서 외부영입이 활발해 졌다. 최근 높아진 회사의 위상을 반영하듯 놀랄만큼 high profile의 분들이 합류하기도 했고, 언뜻 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background의 분들도 합류했다. 그러나, 꽤 높았던 경쟁률(얼핏 듣기에 몇배수가 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셨다고 한다)을 뚫고 리더에게 선택된 사람들은 금방 본인들의 진가를 발휘했다. 전혀 다른 background를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가 고개를 갸웃했던 분조차 정말 빠른시간에 해당 인더스트리를 catch up한 이후 전략을 리드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줘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재미있던 것은 외부영입되어 오신 분들 역시 기존멤버들과 마찬가지의 오해를 리더에게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해라는 것은 별 게 아니었다. 우린 모두 우리의 리더를 ‘과소평가’했었다. 이정도의 리더라면 이런저런 리스크 를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정식 조직 발족이후 진짜 리더로 모시고 난지 한달이 지나고 나서야 우린 리더에 대해 제대로 평가를 할 수 있었다. 처음 예상했던 ‘이 정도’의 3배는 뛰어난 사람이었다.
먼저, 전략기획 스텦으로서 최상급의 문제해결능력의 소유자였다. 뭐 이런저런 일로 인해 메이저펌 컨설턴트를 접했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지만, 리더에게 문제를 가지고 갈 때면 항상 기대가 되었고 그가 해답을 이야기할때면 마치 고3수험생이 족집게 과외선생의 말을 받아적듯 열심히 기록하게 되었다.
처음 우리가 감탄했던 인더스트리 전문가로서의 인사이트도 다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전체 밸류 체인을 조감하면서 회사내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슈를 제기하고 대안을 마련해 나갔다.
그렇다고 단순한 책상물림도 아니었다. 컨설턴트들이나일반적인 전략기획스텦들이 신사업을 진행할때는 보통 가장 앞단의 전략만 세팅해두고 그 뒤의 실행단은 사업부에 맡기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리더 앞에서 요정도 해본 것 가지고, ‘신사업 좀 해봤다’라고 이야기 했다간 혼난다. 리더가 이야기하는 ‘신사업 한번’은 초기 전략 수립 및 사업기획을 한 이후, 본인이 사업기획할 때 적었던 초기 매출 목표를 달성해 내는 것을 말했다. 이 한번을 위해 때론 양아형님들에게 협박받기도 했으며, 검찰청과 경찰서를 들락날락 하기도 했다. 이런 고단한 ‘실행’의 경험이 리더의 평소 지론인 ‘실행을 위한 전략’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 뿐인가. 리더는 누구보다 고객지향적인 사람이다. 이 역시 갖은 종류의 고객 클레임을 온 몸으로 감당하면서 평범했던 점포를 전국 1등으로 만들어냈던 경험에 근거하고 있었다. 언젠가 1등의 비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고객의 눈높이로 사고하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고 감탄을 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감탄했던 부분은 바로 내부고객커뮤니케이션이었다. 누가 addict.에게 대기업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량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내부커뮤니케이션역량이라고 답하고 싶다. 정말이지 대기업의 커뮤니케이션의 복잡도는 경험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다. 어떤 일을 추진함에 있어 담당자를 찾는 것이 일의 절반이다. 무엇을 누구에게 언제 이야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고차방정식을 푸는 것 이상의 머리굴림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밸류체인 전반을 컨트롤해야….
(이 역시 미완성 포스트로 남겨진다. 역시 글을 시작했으면 그 자리에서 끝을 봐야 한다. 2010년 5월 23일 저장된 글이다)